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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신부9차서신연구
김대건신부 9차 서한 - 아래- [둘째 날(1844년 2월 6일), 우리는 (큰 말뚝으로 울타리를 친 몽고와 만주 국경선인) 장책(長柵)을 지나서 만주로 들어갔습니다. 넓디넓은 들판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서 어디를 보나 눈부신 단조로운 흰빛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썰매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기 위해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빠른 속력으로 사방으로 달리는 광경이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는 눈요기 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들판을 지나 처음 도착한 도시가 길림(吉林)이었는데,] 김대건 신부님은 장춘 소팔가자를 출발 장춘에도착 그다음날 길림으로 출발 장춘 길림구간의 여정은 현재 3곳의 도로가 있었음 당시 1844년도의 옛도로는 长春市志-公路交通志의 사료를 근거로 그 구간을 추정하였음 [자료 ] 장춘 길림 ..
김대건 신부9차서한 [주교님의 강복을 받고 주교님과 하직한 후(즉1844년2월5일), 우리들은 썰매를 타고 눈 위로 빨리 달려 몇 시간이 안되어 장춘(長春)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지냈습니다. 이튿날 떠나 둘째 날 우리는 말뚝으로 둘러막은 울타리를 넘어 만주로 들어갔습니다. 들판은 온통 눈으로 덮여 어디를 보나 단조로운 백색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가기 위해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속력으로 달리는 수많은 썰매들은 우리들 눈에 흥미 있는 풍경으로 보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도시는 길림(吉林)이었는데, 길림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성(省 즉 길림성)의 수도이고, 장군(將軍) 혹은 부도통(副都統)이 주재하는 곳입니다. 길림은 송화강(松花江) 동쪽 강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김대건 신부 9차서신] 마침내 우리는 영고탑 근처에 있는 ‘마첸호’(Ma-tsien-ho)'에 도착하였는데, 6백 리 떨어진 바다에까지 이르는 길이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7~8년 전만 해도 도중에 여행자들을 받아들일 만한 집이나 초막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길손들은 떼를 지어 가야 하였고 또 밤이 되면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여 호랑이들을 쫓기 위해 아침까지 불을 계속 피워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객줏집들이 행길까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객줏집들이란 나뭇가지와 그 줄기들을 포개 놓고, 그 사이에 난 아주 큰 구멍들을 진흙으로 메워서 원시적으로 지은 큰 초가들입니다. 그것을 건축한 사람, 그리고 지금은 연기에 그을린 이들 숙소에 사는 집주인들은 이 지방 말로 ‘쿠앙쿤체’(Kouang-koun-tse,..
김대건신부 9차서한중 청대 당시의 역로 역점 서술내용 [마침내 우리는 영고탑 근처에 있는 ‘마첸호’(Ma-tsien-ho)'에 도착하였는데, 6백 리 떨어진 바다에까지 이르는 길이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7~8년 전만 해도 도중에 여행자들을 받아들일 만한 집이나 초막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길손들은 떼를 지어 가야 하였고 또 밤이 되면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여 호랑이들을 쫓기 위해 아침까지 불을 계속 피워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객줏집들이 행길까에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객줏집들이란 나뭇가지와 그 줄기들을 포개 놓고, 그 사이에 난 아주 큰 구멍들을 진흙으로 메워서 원시적으로 지은 큰 초가들입니다. 그것을 건축한 사람, 그리고 지금은 연기에 그을린 이들 숙소에 사는 집주인들은 이 지방 말로 ‘쿠앙쿤체’..
영고탑 훈춘간 역로상 역점 김대건신부가 진주문을 나와 어떤 주막집에 머물다, 1844년음력설을 지나 훈춘으로 이동 하는 역로상의 역점을 중국 사료상으로 확인하는것이 중요함 서신내용 ---------------------------------------------------------------------------- 그리고 나서 음력 1월 4일(양력 1844년 2월 21일)에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된 썰매를 그곳에 버려두고 말 등에 안장을 얹고 주막 주인의 마차를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마차꾼들에게 약조한 삯을 지불하는 대신 산림을 지나가는 동안 우리말들에게 여물을 주고 우리 식량을 운반해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산림 속에서는 몸을 녹이고 음식을 익힐 나무 밖에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위 이미지: 청시대 역로 모습 “길림통지”57권에 의하면 길림에서 산싱(혹은삼성 三姓) 역참과 기타 각 역참사이의 거리는 , 길림우라(乌拉)역으로부터 세개 역참을 거쳐 텅어얼저쿠역(腾额尔哲库)에서 갈라져 부도통(三姓副都统) 소재지에 이를수 있다. “텅어얼저쿠역에서 갈라져 80리면 몽고카룬(卡伦)역 (지금의 길림성,위수현타이안향신짠촌, 라린하지류 카차하좌안) , 70리면 라린둬환역(지금의 흑룡강성 우창현 훙치향 둬환촌 ‘혹은 오상현 홍기향 다한촌’ ), 70리면 사쿠리역(지금의 흑룡강성 아성현 성남 약20리의 쌍풍향 쌍란촌), 65리면 비커투(费克图)역(지금의 아성현 비커투(蜚克图)향소재지), 82리면 사이러버터쿠(塞勒佛特库)역(지금의 흑룡강성 빈현빈안진),61리면 버스헝(佛斯亨)역(지금의 흑룡강성 무란현..